충남 보령 오천항에서 조금 더 가면 바닷가의 갈매못순교성지에 다다른다.
이곳 앞바다는 섬과 육지로 둘러싸여 마치 연못처럼 보여서 갈매못이라 한다.
갈매못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파리 외방 전교회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그리고 다블뤼 주교의 복사였던
황석두 회장, 베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 회장 등 다섯 성인과
많은 무명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신리(新里, 충남 당진시 합덕읍)에서 체포된 다블뤼 주교는 박해시기에 더많은 교우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숨어있던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에게 자수를 권했다.
두 신부는 주교의 뜻에 순명하며 신리로 와서 자수해 황석두 루카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순교자들이 체포되었을 당시 조선 왕실은 고종과 혼인할 왕비의 간택을 앞둔 시기였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서울 인근에서 그들을 처형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여
1866년 3월 23일 군문효수형을 받은 후 서해안 수군 사령부, 충청 수영(水營)으로 끌려갔다.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십리 떨어진 곳에 있는 백사장이었다. 수영성의 군율 집행터인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가 현재 갈매못 순교성지다.
갈매못 지명은 갈마연(渴馬淵)에서 온 말이다.
‘갈증을 느낀 말이 목을 축이는 연못’이란 뜻이다.
세 선교사와 황석두 회장이 충청 수영으로 이송될 때 서울에 갇혀 있던 장주기 회장도 동행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갈매못까지 약 250리 길을 며칠 동안 끌려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1866년 3월 30일에 처형당했다. 그날은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다.
다섯 성인이 순교한 지 59년 후인 1925년에 갈매못 인근의 금사리본당 정규량 신부(레오, 1883~1953)는 순교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증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순교터와 효시터, 임시 매장터를 확인하였고
1927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지를 가꾸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꾸준히 성지를 보존하고 가꾸어 오늘의 모습을 이루었다.
갈매못순교성지에는 야외 제단, 기념관을 겸한 소성당, 십자가의 길, 승리의 성모성당이 있다.
순교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소성당은 기도의 공간이면서
갈매못 순교자들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기념관으로 만들어졌다.
소성당 벽면에는 성인 유해와 순교화, 유물과 유품을 전시해
갈매못이 담고 있는 순교의 역사를 말없이 이야기 하고있다.
돌로 제작한 성당의 제대와 감실(한진섭 요셉 조각가 제작)도
순교자들의 신앙이 얼마나 굳건했는지를 말한다.
갈매못순교성지의 가장 높은 곳에는 승리의 성모성당이 있는데, 그곳으로 올라가는 길에
15처 조각상(김종필 라파엘 조각가 제작)이 있다.
15처는 성지와 바다와 어우러져 더욱더
보는 이들이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15처가 끝나고 승리의 성모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는
성체조배실이 자리하고 있으며 벽쪽에 다섯 성인성상이 모셔져 있다
계단끝 성당 출입구에는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Qui a Jésus a tout)라는
성 다블뤼 주교의 좌우명이 적혀있다.
승리의 성모성당 내부에는
다섯 성인 유해 공경실이 있으며
제단 뒷 스탠드 글라스는 (허명자 데레사 화가 작품)으로 순교한 다섯 성인이
촛불처럼 추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검은 부분이 소나무와 줄기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 사이 사이로 빨간색 십자가 다섯 개는 바로 성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박해 당시 지금의 성당이 산이였고 산속에 숨어서 모래밭 순교 현장을 내려다보던
교우들의 눈에 비쳤던 모습을 나타낸것이라고 한다 .
이 제단 유리화는 양편으로 문이 열리게 되어있는데 문을 개방하면 순교의 현장인
갈매못과 서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이곳이 순교자의 거룩한 땅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순교성인 5인은 1968년 10월 6일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로마 교황청에서 시복되었고
한국천주교 200주년되던 해인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승리의 성모성당
성당 아래에도 땅이 많은데 왜 산에다 성당을 지었을까?
지금의 성당 자리는 다섯 분이 순교하시던 그 순간에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모였던 신자들이 머물었던 산이였습니다 .
당시에 형이 집행될 때 그 모래사장에는
약 200여 명의 포졸들이 총과 칼로 무장을 하고 있어.
당연히 그 근처에 천주교 신자들은 얼신 거릴 수도 없었죠.
그래서 그 신자들이 여기 산으로 왔습니다.
높은 데 올라와서 소나무 사이로
자신의 몸을 숨기고 그렇게 지켜봤어요.
제대 뒤에 있는 스탠드글라스는
검은 부분이 소나무와 줄기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 사이 사이로 빨간색 십자가 다섯 개는
바로 성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숨어서 현장을 내려다보던
교우들의 눈에 비쳤던 현장의 모습입니다.
승리의 성모상
이 성모상은 1629년 프랑스파에 건립된 “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모셔진 성모상이다.
다블뤼즈교는 성모의 은혜를 수없이 체험한 선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