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일 : 20. 7. 26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의정부교구)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17 (천주교 길음동 교회묘원 내)
* 성 남종삼 요한 (南鐘三, 1817-1866년)
남종삼 성인은 1817년 충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큰아버지 남상교의 양자이며 103위 성인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인 '승지'까지 지냈습니다.
신앙심이 깊고 경건한 마음의 소유자인 남종삼은 직책에 있으면서 '백성의 아버지' 역할을 하며
천주교인의 본분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관직에 있는것이 직챙상 이유로
서울 종묘나 시골 향교에서 제사에 참여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당시에는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성사를 주지않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제사를 미신행위로 보았기 때문에 제사 금지 지침을 내렸고
이로 인해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는 단초를 제공 하였습니다.
1939년이 되어서야 제사를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보지않고
문화적 풍속이라고 해석하며 제사를 허용하게 됩니다.
남종삼은 관직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자 그의 아버지 남상교가 그랬던 거처럼
관직을 버리고 성사를 받게 됩니다.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리델신부 등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고
남상교와 남종삼의 집에는 손님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손님이 늘어나자 손님들을 대접을 해야했고 집안의 가세가 점점 어려워지자
남종삼은 마음에 없는 관직을 찾아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됩니다.
서울로 온나온 그는 승지로 입명되어 왕실에서 머물며
고위 관직자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대원군의 집에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바닷가에서는 이양선이 출몰하는 등 서양세력에 의한 동북아
근대화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면서 두만강까지 남하하여 조선에
통상요구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남종삼이 흥선대원군을 만나서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수교를 맺고
서양의 힘으로 러시아 남하를 막자’(이이재이)는 '방아책'을 건의합니다.
대원군은 추후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와 함께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으나
그 사이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러시아가 물러나면서 방아책이 필요가 없어졌고
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들과 비밀리에 만난다는 것을 알게된 안동김씨세력이
대원군을 비난하면서 정치적 입지가 불리해지게됩니다.
결국 대원군은 정권유지를 위해 천주교 박해를 결심하게 됩니다.
1866년부터 1873년까지 7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게 되고
이것이 병인박해입니다.
남종삼은 붙잡혀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받으며 순교합니다.
극심한 신문을 받았음에도 천주교인의 이름을 대지 않았고
죽기전 형장에 끌려 갔을때는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부친 남상교(아우구스티노)는 공주감영으로 끌려가 옥에서 순교하게 되고
14세 큰아들 남명희는 전주감영으로 끌려간 뒤 전주 초록바위에서 전주천으로
수장되어 순교합니다.
부인 이조이(필로메나)는 유배지인 창영에서 순교하였고
막내아들 남규희와 두딸 데레사와 막달레나는 노비 생활을 하게됩니다.
이렇게 남종삼 가문은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순교를 하였고
나머지 가족들도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남종삼 요한은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게 됩니다.
[BGM]
Still Moving On - LUMINAR
Gone - Beneath the Mount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