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제작 | 수원교구 홍보국
| 촬영 / 편집 / 내레이션 | 성지순례하는 남자(이민호 베드로)
| 글(설명) | 이선규 대건 안드레아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지혜 6,10-11).
광암 이벽은 1754년생으로 영·정조때의 분이시며 유교가 전통적 체제로 사회,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시기에 중국에서 가져온 서학책으로 구원의 진리를 탐구하며 깨닫고 스스로 교리를 실천하셨던 분입니다. 이러한 이벽의 신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소중하고 귀한 깨우침을 줍니다.
광암 이벽은 천진암 암자에서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등과 함께 강학회를 열고 천주교의 교리를 탐구하며 함께 연구하였고, 이승훈을 중국에 보내어 조선의 첫 세례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돌아온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됩니다. 이후 명례방(현재 명동)에 있던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주기적으로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을사 추조 적발사건을 통해 이 땅에서 일어난 첫
번째 박해의 중심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천진암이 있는 퇴촌면 초입부터 성지 입구까지의 좁은 1차선 길을 오르면서, 칠흑같이 어두운 숲을 달려 천진암으로 향하는 청년 이벽의 벅찬 가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더 높고 더 넓은 곳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이벽에게는 현실의 그 무엇도 장애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천진암 성지는 1960년대부터 다산 정약용의 기록을 기초삼아 1978년부터 천진암 터를 매입하면서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합니다. 그 중심에는 수원교구 소속의 변기영 몬시뇰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이벽은 을사추조 적발사건을 통해 아버지와의 심각한 갈등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일을 굶으며 끝내 병사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양반가의 자제이면서도 변변한 묘를 쓸 수 없어 묘지를 찾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곳저곳 이벽의 묘로 추정되는 곳을 탐문하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마침내 경기도 포천에 있는 이벽의 묘를 찾아내었고 이곳 천진암 터로 유해를 모시고 천진암 성지가 천주교의 시작을 알리는 장소와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완전하게 갖추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