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자녀에게
“공부해야지!”하면
자녀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내가 공부하면
엄마는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 거예요?”
아빠가 자녀에게
“이것 좀 사 올래”하고
심부름을 시키시면
자녀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빠, 내가 심부름하면
아빠는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 거예요?”
공부는 내가 잘 되기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고,
심부름은 집안의 일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때때로 공부와
심부름에 대가를 바라며
행동하곤 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모습도 그러했다.
예수님께서 늘 왕으로
오신다고 하시고, 자신들을
제자로 파견하시며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셨다.
유다 이스카리옷을 포함해
다른 제자들도
큰 이유를 묻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했다.
하지만 하늘나라의 이치보다
세상의 이치를 따지는 유다는
예수님이 시키는 행동을 할 때
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자,
불만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의 날개를
벗어나 세상의 가치를 바로
이야기해 주는 수석 사제들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본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
하지만 그 결과가 눈에 쉽게 보이지
않아 쉽게 쓰러지고, 넘어지며,
주님께 이렇게 말을 한다.
“주님 제가 선행하면
제 구일 기도 들어주셔야 해요.”
“주님 제가 성당 잘나가면
원하는 대학 합격시켜 주셔야 해요.”
“주님 제가 봉헌하면
저의 아픈 병을 낫게 해 주셔야 해요.”
주님 앞에서 “무엇을 하면 무엇을
해주셔야 하는 말”은 백 번 해도
주님의 답은 똑같을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왜 내 핑계를 대면서 하는 것이냐.
나는 너희 기도가 없어도 혼자
우뚝 서있을 수 있는 하느님이다.
내가 기도하라는 말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너희와 함께하심을
그래서 너희의 어려움을 함께
해주심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눈에 보이는 기도 응답이 없다고
주님을 떠나기보다는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나의 어려움을 함께
해주시고, 그 고통을 넘어갈
힘주시기를 청하는 하루를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