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무엇이 다를까요? 전반적인 내용은 같습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에서는 분명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4천 명을 먹이신 기적, 두 개를 별개의 기적으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17-21)
분명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나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빵에 대한 걱정을 없애라’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생존 욕구’에 치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책임져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탈출기의 광야 생활’을 상징하고,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에덴 동산의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오는 숫자들의 상징이 그렇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실 때 빵 5개 물고기 2마리를 사용하였습니다. 숫자 ‘5’는 우리 몸에 오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 혹은 사람을 상징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진리’입니다. 모세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면 주님께서 그를 통해 주시는 만나와 물이 진리와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은 12지파, 곧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4천 명을 먹이실 때, 숫자 ‘4’는 ‘땅’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물이 한줄기 흘렀는데 모든 땅을 적셨다고 할 때 그 하나의 물줄기는 ‘네’ 개로 갈라집니다.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땅은 7일 동안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숫자보다는 빵의 숫자가 중요합니다.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은 먹을 것이 풍부한 에덴동산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이 없다고 하느님께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물과 만나를 주시며 그들이 가진 것들을 감사히 봉헌하여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당신이 머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하느님보다는 자신들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소를 섬기는 것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선악과를 봉헌하라 하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많은 소유를 줄 것 같은 뱀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3천 명이 죽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 모든 것은 ‘생존 문제를 주님께 맡기지 못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자아는 오로지 육체의 생존밖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자신도 필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생존을 다 책임져 줄 테니까 그것을 믿는 증거로 십일조를 봉헌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충분히 믿지는 못합니다. 교회는 생존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연습을 하는 학교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처럼 또 쫓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좀비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이 인기입니다. 우리 세상이 이 학교와 같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정확히 ‘네’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이미 좀비가 된 인간입니다. 그들은 항상 배가 고픕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해치면서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그냥 좀비가 되어버린 인간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는 그 좀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살아가는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살아가는 목적은 죽지 않기 위함입니다. 남을 해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좀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좀비가 되었는데 의식이 있는 좀비가 된 존재입니다. 그들은 분노에 차서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합니다. 이제 죽을 걱정이 없어서 다만 자신의 미움과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귀남과 같은 존재입니다.
네 번째 부류는 역시 좀비가 되었지만 사랑 때문에 좀비가 되어서도 의식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 좀비들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합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세 번째 부류처럼 죽음에 대한 걱정이 별로 없습니다. 반장의 경우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을 생각해 볼까요? 독일 군인들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을 하는 첫 번째 좀비와 같은 부류입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히만도 자신은 살아야 했기에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모기가 피를 빨아먹는 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다만 자신이 모기인 줄 모르고 평생을 산 어리석음이 죄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살 가능성도 있고 죽을 가능성도 있는 두 번째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좀비와 같은 독일 군인들을 피해 다닙니다. 그러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이들도 똑같은 신세가 됩니다. 여전히 죽음에 대해 걱정하며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부류입니다.
그런데 별로 죽을 것 같지 않아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데 그 꿈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드는 부류입니다. 히틀러의 경우입니다. 그는 굶어 죽을 걱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좀비들을 이용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는 있습니다. 보통 사람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지시에 좀비가 되어버리게 만드는 좀비 우두머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세 번째 부류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부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좀비들과 좀비 마왕들에 맞서는 이들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를 위해 대신 죽음을 선택한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과 같은 분들입니다. 또 유대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의인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세상에 속해있건 이 네 부류에 반드시 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려는 자는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심판의 기준에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들은 네 번째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시고 4천 명을 먹이시며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생존 걱정하지 말고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닐까요?
살기를 원한다면 절대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 어린 고아들이 무서워하자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192명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가스실로 들어간 야노쉬 코르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을 만드는 학교가 바로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학교에서 어느 부류가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네 번째 부류의 특징은 예수님처럼 작은 것으로 ‘감사의 기도와 봉헌’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생존을 책임져주신다는 증거로 감사의 십일조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 오늘 기적의 핵심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