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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성지순례회 나바위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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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썸네일 스텔라의 성지순례
구독자: 1750  조회수: 754회  유튜브등록일: 2025-05-29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 성지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위치한 나바위성당은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오래된 성당의 하나로 명동대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Poisnel, 1855~1925)가 설계했다.
1897년 초대 주임 신부인 베르모렐 신부
(J. Vermorel, 장약실 요셉, 1860~1937, 파리 외방 전교회) 가 사목하면서
1906년에 한식 목조 양식으로 지었다.
당시 신자수는 2,900여명이었다.

1916년에는 기존 성당을 좀 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외부 흙벽을 서양 벽돌조로 바꾸었고,
입구에 고딕식 종탑도 새로 설치했다.한식 기와지붕을 덮은 높은 창문은
부활과 진복팔단을 상징하는 팔각형으로 만들어 빛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게 했다.

나바위성당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목조 건축 기법과 서양식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다.
이처럼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성당은국가문화재(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화산리’라는 지명은 지금 성당을 담고 있는
산이 절경이어서 송시열이 지어준 화산에서 유래하였다.

성당 이름도 산 이름을 따라 화산 성당이라고 불러 오다가 완주군 화산면과 혼동을 피하고자
1989년부터 ‘나바위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들판 한가운데 엎어놓은 사발 모양의 아름다운 화산(華山)에 나바위성지가 자리 잡고 있다.
화산의 가장 높은 곳에 너른 바위가 있는데
사람들이 나바위(나암, 羅岩)라 불러서 고유한 성지 이름이 됐다.

오늘날에는 화산 아래가 들판으로 변했지만 1925년 간척하기 전까지는 금강물이 흘러든 뱃길이었다.
1882년 나바위 공소가 설립 되고 1897년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1921년 6월에는 현 논산부창동 본당을 설립 분리 시켰으며,
1930년경에는 신자수가 3,200명에 달하였으며, 안대동(현 함열) 본당, 군산(현 둔율동) 본당,
이리(현 창인동) 본당 등을 설립, 분리시켰다.

일제시대에는 신사 참배 거부에 앞장섰으며,
6.25 전쟁 중에도 미사가 끊이지 않은 유일한 본당이었다.

성당 내부 가운데는 칸막이 기둥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것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 관습에 따라
신자석 자리를 남녀로 구분한 것이다.
또한 성당에는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1906년), 목조 세례대, 예수상, 성모상,
요셉상처럼 오래된 성물이 잘 보존돼 있다.

나바위성당의 유리화(2009년 작)는 유리에 한지를 겹쳐 붙인 후 그림을 그려 제작한 것이다.
송현섭(베드로) 신부가 만든 한지 유리화를 통과한 빛은
은은하게 성당 내부를 물들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같은 작가가 만든 한지유리화는 성지 역사관 창문에도 장식됐다.


치유의 경당

건물의 역사와 의미 1956년에 건축된 이 건물은
당시 진료소와 성당의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성 바오로 회 수녀님들에게 의해 운영되었던
이 진료소는 단순히 약을 나누어 주는 시약소의 단계를 넘어 소규모 의원에 못지않은
의료 기구를 갖추고 있어 간단한 수술까지 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육체적 치료와 마음의 치유 또한 주었던
역사적 의미가 깊은 장소라하겠다. 훗날 보수작업을 통해 1층은 개인 피정의 장소로,
2층은 본당의 경당으로 사용하다가 2016년 성지 재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2층 강당을 수리하여 현재의 '치유의 경당'으로새로 나게 된 곳이라고 한다

경당에 들어가며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 지셨다." (마태 8.17)

구세주 예수님, 당신수난의 공로로 이곳을 찾는 이들의 병고를 낫게 하시고
상처받은 영혼에 치유를 허락하소서

[ 나바위 성지 역사관 ]

성당 옆에는 한옥으로 지은 나바위성지 역사관이 있다.
1917년에 건립돼 사제관으로 사용하다가
2019년 본당의 역사관으로 꾸며졌다.
역사관 안에는 김대건 신부 초상화(영인본)와 어록, 라파엘호의 축소 모형이 전시돼 있다.
또한 본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문서, 제구와 제의류, 성물과 성당 건축 자재 등이 있다.
성당에서 문맹 퇴치를 위해 건립한 계명(啓明)학교(1907년 설립, 1947년 폐교)에 관한
자료들도 살펴볼 수 있다.

성체조배실

성체조배실은 초창기 신부님들께서 불을 떼던 아궁이가 있던 곳이며
외국 선교사 신부들이 직접 빵을 구워 드셨던 사제관 식당 자리이다.
또한 신부님들께서 직접 재병을 만드시던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나바위 성당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몸소 고난의 길을 걸으며 헌신했던
초대 신부님들의 고귀한 정신이 깃든 곳이다.
이곳의 성채 조배실과 성서쓰기 방을 마련하였다.

나바위는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가 되어 조국에 입국하며
첫발을 디딘 축복의 땅으로 ‘첫 마음의 성지’ 로 불리고 있다.
1836년 12월, 15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마치고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월 선교사들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고
그들이 거처할 집을 마련코자 서울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1845년 4월 선교사를 모셔올 목선을 구입하여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
그 해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8월 31일, 11명의 교우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타고 갔던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끝에 1845년 10월 12일 밤 8시 경 강경에서
좀 떨어진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나바위로 정박한 이 일을 페레올 주교는 그의 편지에서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였다.

성 김대건 신부 일행 착륙지점

망금정 바로 아래, 화산 언저리는 김대건 신부 일행이 타고 온 배가 정박한 지점으로 알려진 곳이다.
길을 인도하는 대천사 라파엘의 이름을 붙인 배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작은 무동력 목선(길이 13.5m, 폭 4.8m, 높이 2.1m)로 실제의 배모양의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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