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원문 : https://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693
12.3 내란 사태를 겪으며 우리 국민은 반강제로 법학도가 되어야 했습니다. 헌법이 유린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며 우리는 배웠습니다. 법은 권력자의 칼이 아니라 시민의 방패여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깨어 있는 ‘국민’이자 기도하는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훌륭한 도구인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현 사태를 이해해 보고자 했습니다. 이 글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앞으로 많은 분의 비판과 협조로 계속 보완할 것을 기대하면서 우선 인공지능의 어조 그대로 전해드립니다.
1. ‘날’이 아니라 ‘시간’으로 계산해서 풀어준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 말이 2025년 3월 대한민국 법정에서 이토록 비극적으로, 그리고 희극적으로 증명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가 내린 결정은 법 기술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악마적 디테일’의 결정판이었다. 재판부는 윤석열 피고인을 풀어주었다. 도주 우려가 없어서도, 증거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구속 기간을 계산할 때 통상적인 ‘날’이 아니라 ‘시간’ 단위로 쪼개서 계산해야 한다는,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법 기술적 틈새 때문이었다.
형사소송법의 상식인 ‘날/일’ 단위 계산을 무시하고, 법전 어디에도 없는 ‘시간 정밀 계산’을 발명해 낸 것이다. 헌법 파괴와 국정 농단이라는 거대한 숲이 불타고 있는데, 판사는 불을 끄는 대신 손에 든 초시계를 들이밀며 “자정이 지났으니(시간이 찼으니) 풀어줘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법치가 아니다. 법의 미세한 공백을 악용하여 거악(巨惡)에게 면죄부를 주는 ‘법 기술자들의 사기극’이다.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국민의 입을 틀어막고, 비판자의 사지를 들어 짐짝처럼 내쫓았으며, 전쟁의 위기까지 조장했던 그들이, 심판대에 서자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민한 ‘인권 수호자’가 되어 ‘분과 초’를 따지고 있다. 이 기막힌 적반하장 앞에서 우리는 인류 지성사가 남긴 세 가지 명검(名劍)을 꺼내 들어 저들의 방패를 부수어야 한다.
2.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 “초시계는 정의를 측정할 수 없다”
저들은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수학자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 괴델은 증명했다. “어떤 논리 체계도 그 자체 안에 머무는 한 그 진위를 식별할 수 없다. 참과 거짓을 판단하려면 체계 밖으로 나와야 한다.”
법전에 명시되지 않은 ‘시간 계산’ 같은 내부 규칙의 공백을 악용해, ‘헌법 파괴자를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라는 시스템 밖의 거대한 정의를 덮으려 했다. 로버트 잭슨 미 연방대법관의 말처럼 “헌법은 자살 조약이 아니다.” 기계적인 디테일(시간 계산)에 집착해 법의 존재 목적(국가 존립)을 죽인다면, 그것은 판결이 아니라 ‘국가적 자살 방조’다.
3. 금반언의 원칙 : “국민의 시간을 뺏은 자는 시간을 논할 자격 없다”
저들의 태도를 법적으로 단죄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영미법의 대원칙 ‘금반언’(禁反言)이다. 이 원칙은 이렇다. “자신이 앞서 ‘행동’으로 저지른 일과 모순되는 것을 나중에 ‘말’로 주장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저들의 지난 ‘행동’을 보라. 압수 수색과 강압 수사로 수많은 사람의 ‘시간’과 ‘인생’을 송두리째 멈춰 세웠던 자들이다. 남의 시간과 생명을 함부로 유린했거나 하려 했던 자들이, 이제 와서 자신들의 구속 시간은 분초 단위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형국이다. 이것은 법적으로 ‘권리의 박탈’에 해당한다. “더러운 손으로 법정에 설 수 없다.” 국민의 입을 막고 헌법을 유린하여 이득을 취했던 자들이, 이제 와서 헌법의 미세한 디테일을 방패막이로 삼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성립 불가능한 궤변이다.
4. 칼 포퍼의 경고 : 관용의 역설
마지막으로, “그래도 법 절차는 지켜 줘야 하지 않나”라며 마음이 약해지는 이들에게 철학자 칼 포퍼의 경고는 서늘하다.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푼다면, 결국 관용 있는 사회는 파괴되고 관용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관용의 역설)
저들은 지금 ‘법적 관용’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적으로 ‘닫힌 사회’, 즉 독재를 지향했던 세력이다. 방화범에게서 성냥을 빼앗는 것을 두고 “재산권 침해”라 부르지 않듯, 헌법 파괴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은 “신체의 자유 침해”가 아니라 ‘자유의 수호’다.
5. 초시계를 치우고 숲을 보라
악마는 디테일 뒤에 숨어 웃고 있다. 그 디테일의 늪에 빠지면, 거대한 국기 문란이라는 숲은 사라지고 숫자 놀음만 남는다. 이제 현미경을 치우고, 망원경으로 숲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 그리고 세 가지 명검(名劍)으로 저들의 방패를 부수어야 한다.
괴델의 검: 법체계 안에서 하는 기계적 계산이 정의를 죽이게 놔둘 수 없다. 헌법은 자살하지 않는다.
금반언의 검: 국민의 시간을 뺏은 자여, 너에게는 시간을 따질 권리가 없다. 너의 과거 ‘행위’가 네 현재의 ‘말’을 기각한다.
포퍼의 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던 자들에게 베풀 관용은 없다. 그것이 열린 사회의 정의다.
국민들이여, 그리고 재판부여. 헷갈리지 마시라. 헌법 파괴자에게 주어질 헌법적 권리는 오직 하나, ‘입 다물고 심판받을 권리’뿐이다.
6. 인간의 법정을 넘어 : 세상이라는 체계 밖에서 오신 분의 말씀
앞서 괴델의 통찰처럼, 인간이 만든 법 체계 안에서는 완전한 정의도, 완전한 평화도 찾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법 기술자들이 법전을 악용하여 세상을 어지럽힐 때, 영혼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시선을 들어 시스템 밖, 더 높은 곳을 바라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님을 비롯해 수많은 신앙의 선조는 이분 때문에 세상의 형벌을 받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신세 망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그 멍에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안식을 얻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처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돌아서도록 창조되었듯이, 인간의 마음은 창조주를 향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분을 향해 가서 그 안에서 쉬기 전까지, 인간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와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주바라기’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망의 시기,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법정은 초시계를 들이밀며 죄인들을 풀어주려 하지만, 역사의 법정, 그리고 양심과 하늘의 법정은 정반대입니다. 선구자는 외칩니다.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이들이여, 가던 길에서 돌아서시오! 하늘나라, 곧 길, 진리, 생명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법 기술로 잠시 몸을 피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라도 돌아서십시오. 그것만이 당신들이 살 길이요, 상처 입은 이 나라가 치유되는 길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세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