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 다락골
충남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 이라는 명칭은 마을의 형태가 다락 [樓] 모양과 같다는 데서 유래한 것 인데, 다래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다래골’ 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직후로 추정된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인 최한일(崔漢馹)이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죽고 곧이어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자, 증조모인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외아들 최인주(崔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를 데리고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청양 지역에는 이미 그 이전에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신해박해 때에는 홍주(洪州)의 박취득과 원베드로, 청양의 황바오로 등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청양 다락골 줄무덤은
한 무덤에 여러 사람을 함께 묻었다고 하여 줄묘라고도 부른다. 1866년 병인박해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천주교들을 탄압할 때 공주와 홍주감옥에서 순교한 천주교인들이 매장되어 있다. 총 37기가 있으며, 주로 가족 단위로 매장되어 있다.
최양업신부 조부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장성한 뒤 이곳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약 700m 되는 골짜기로 이주하였다. 그뒤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新垈]’로 명명되었다. 최양업 신부와 그의 아버지인 최경환(崔京煥, 프란체스코)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 1830년대 초에 경기 안양의 수리산(修理山)으로 이주하였다.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들의 묘소로 추정되는 37여기 묘가 이곳 다락골에서 줄무덤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묘들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다만 최양업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야음을 타 급히 옮겨다가 이 마을 뒷산인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증언을 이 마을 노인들이 전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집안들은 박해가 닥칠까봐 이 무덤이 신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몇 년 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이 마을을 불살랐고,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청양 다락골 대성전안에는 두팔이 없는 십가가를 볼수 있는데
두 팔이 잘려 나간 이 십자가는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폐허가 된 독일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한 성당을 재건 하던 도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팔이 필요합니다.그분께서는 팔을 통해 모든 인류가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팔을 빌려주십시오.“
라는 뜻의 두 팔 없는 십자가상
최양업신부 조부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장성한 뒤 이곳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약 700m 되는 골짜기로 이주하였다. 그뒤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新垈]’로 명명되었다. 최양업 신부와 그의 아버지인 최경환(崔京煥, 프란체스코)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 1830년대 초에 경기 안양의 수리산(修理山)으로 이주하였다.
생가터에 마련된 최양업 신부 탄생기념 경당은
최양업 신부가 1890년 경신박해를 피해
생쌀을 먹고 은신하며 미사를 드린 울산 죽림굴의 모습을
재현한것입니다
길고 널찍한 바위로 제대를삼고,
제대위 천정에는 최신부가 밤마다보았을 별자리를 새겼습니다.
또한 그의 삶을 닮은 곧은 대나무를 길게 잘라 거푸집을 대고
건물에 대나무 문양을 넣었습니다
최양업신부가 태어난 탄생지 그리고 삶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낸
죽림굴을 닮은 경당에서 우리 인생의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글이 생가터에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