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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 성 블라시오 축일 - 2026년 2월 3일
오늘은 저의 세례명이자, 수도명의 수호성인이신 성 블라시오 주교 순교자의 기념일입니다. 아르메니아의 주교로서 신앙을 증거하신 성인의 전구로 여러분 모두의 영육간 건강을 기원합니다. 특별히 이 분은 ‘목’의 건강을 지키는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성 블라시오의 강복은 유럽에 널리퍼져서, 오늘 ‘목 축복’을 하는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주 가톨릭신문에 갑자기 내 아빠스 축복식 사진이 나와서 당황했습니다. 뭔 내용인가 보니, ‘교회에는 아빠가 많다!’는 정겨운 제목과 함께, 교회 안에 아버지라는 호칭에 대해서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 ‘아빠’이기 때문에, 언어가 달라도,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기의 발음은 ‘엄마’ ‘아빠’와 비슷합니다. 중동 지방의 아람어에서도 ‘아빠’라고 친밀하고 부렀고, 이런 전통이 이집트와, 시리아 등 동방 교회의 수도생활 안에서도 수도원의 영적 아버지를 ‘아빠’abba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아빠스’라는 말이 나왔고, 얼마 전에는 마산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여자 대수도원장인 ‘아빠티사’Abbatissa 축복식이 있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파파’(Papa)라고 부르는 교황님도 아빠이고, 우리의 신앙의 전통을 이끌었던 ‘교부’들도 교회의 아버지들입니다. 그리고 신부님들도 Pater, Padre, Father 이렇게 아버지로 불립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우리는 늘 기도를 바칩니다.
오늘 아빠스의 수도명 축일이라, 미사 시간도 이렇게 바꾸고, 우리 형제들과, 수도자들, 봉헌회원들과, 신자들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게 되어 기쁘고, 송구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독서, 로마서(5,1-5)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내(Hypomonē, υ˙πoμoνηˊ )’를 강조합니다. 이는 수동적인 참음이 아니라, 어떤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이 주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거룩한 버팀’을 뜻합니다. 제가 우리 형제들에게 여러번 강조했던 것 처럼, 수도자들의 기도자리, ‘코러스’ 자리 70센티미터의 그 넓이를 내가 지킬 수 있으냐, 아니냐에 따라서 수도 공동체의 생활이 결정된다고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어제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과, 축성생활의 날을 지내면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진 그 놀라운 은총이 우리 안에 살아있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고, ‘거룩한 버팀’이 필요함을 되새겼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의 말씀 처럼,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이 구절은 작년 희년의 모토였고, 우리 베네딕도 회원들의 봉헌의 기도, Suscipe와도 맥을 같이 한다고 얼마 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 그러면 저는 살겠나이다. 주님은 저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교황 권고 「축성 생활」(Vita Consecrata)에서 수도자들이 세상의 환난 속에서도 희망의 표징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셨습니다. 현대인들은 즉각적인 결과와 효율에 매몰되어 인내의 가치를 잊곤 합니다. 성 블라시오 주교님께서는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셨던 그 ‘인내’-휘포모네-가 우리를 희망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블라시오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목의 축복’도 기원해 봅니다. 성인께서 목에 가시가 걸린 아이를 구하셨듯,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목에 걸려 있는 ‘탐욕의 가시’, ‘소통을 방해하는 가시’를 뽑아야 하겠습니다. 목은 소리를 내는 장소이기도 하고, 탐욕을 표현할 때 ‘목구멍’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목이 타인을 비난하거나 탐욕을 채우는 통로가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희망의 통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 블라시오 주교 순교자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